그날은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 듯 비가 왔다. 축축하고 우울한 공기가 우리를 감쌌다. 그 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 주변 공기의 흐름을 뒤바꾼 것만 같았다. 나는 비식거리며 짧게 웃었다. 빗소리가 거세졌다. 그 애는 이민을 간다고 했고, 나는 멍청히 물었다. 어디로? 어디인지는 중요한 게 아님에도.
“미국에 텍사스라는 곳이 있대. 거기로 갈 생각이야.”
텍사스, 텍사스. 나는 신문이든 티비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그곳의 이름을 곱씹었다.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. 두 번, 세 번, 네 번.
“따뜻한 곳이래, 비도 안 오고.”
“다행이야.”
너 춥고 비 오는 거 싫어하잖아. 뒷말은 꾹 눌러 삼켰다. 나는 반대로 비가 오고 흐린 날이 좋았다. 우린 자주 이 주제로 논쟁을 펼치곤 했는데 언제나 승자는 그 애였다. 아무래도 데이트는 맑은 날이 좋을 것 같아서.
“한국엔 언제,”
“글쎄”
“...”
“미안해”
자조적으로 웃는 모습에 난 이제 질렸어.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더 물어보지 못했다. 나에게, 자신에게, 또 주위의 시선에 질렸겠지. 그렇게 내 첫사랑의 대단원도 막을 내렸다. 그와 동시에 가을의 추위는 예고치 않으며 얇은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. 나는 몸을 웅크리며 양 팔을 맞잡았다. 사랑이라고 명명되는 유치한 감정의 파도에서 형용할 수 없는 찬바람을 느껴야만 했다. 감정의 잔해물들이 한 데로 묶여 내 몸뚱아리를 잠식시킬 것만 같았다. 그 바다 한 가운데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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